이육사 시 연구 리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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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이육사의 생애
Ⅱ.절정에 관한 해석
1. 행동과 사고의 대립적 구조
2.자기극복 의지 또는 운명애의 길
Ⅲ.광야에 대한 해석
1. 시 전반에 걸친 해석
2. 시행에 관한 해석
1) 닭 우는 소리는 들렸는가
2) 가난한 노래와 풍요한 노래
3)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누구인가?
Ⅳ. 청포도에 관한 해석
1. 청포도의 싱그러움과 고귀함
2. 기다림의 철학, 평화사상
◈참고 문헌◈
Ⅰ. 이육사의 생애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육사라는 이름은 그가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 번호가 64(또는 264)여서 그 차음(借音)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군 도산명 원천동 881에서 퇴계이황(退溪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의 6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육사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한 가문이었는데, 그의 투철한 항일 의식은 이런 집안의 가풍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다. 육사는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과 함께 조부에게 천자문과 千字文(천자문), 통감(通鑑), 소학(小學)등을 익혔는데 형제들 모두 재예(才藝)가 뛰어났고, 그들의 우애는 소문이 날 정도로 각별했다. 육사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다소 근엄한 편이었다. 육사의 항일 운동은 1925년부터 시작된다. 대구의 조양 회관에서 애국 지사들과 함께 신문화 강좌를 열고 이듬해 봄에 이정기와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기 투합한 의사들과 만나 조선 독립 운동과 독립 운동 자금 모집 방법 등에 대해 협의를 하고 돌아온다. 백형 원기, 숙제 원일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을 했는데,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탄 투척 사건 혐의로 4형제가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육사 형제들은 이 투탄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이 때의 죄수번호 64(육사)를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2년 6개월 만에 풀려나와 요양을 하던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검속되었다가 풀려난다. 이런 옥고를 연속적으로 치르면서 육사의 건강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1929년 출옥한 그는 이듬해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 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해 학업과 항일 운동을 겸하게 되고 베이징 대학을 졸업한 뒤 <황혼>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