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는 1930년대 민족의 시인, 志節(지절)의 시인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처음부터 남다른 시인이었다. 첫 출발이 문학이 아니었고 독립운동이었다. 짧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가 결국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이다. 그에게는 뚜렷한 습작기가 없었다. 원래 목표가 문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창작을 위한 수업이 거의 없었다. 대개 중학교 과정에서 뚜렷이 알려진 것이라고는 독립군 양성의 군관학교의 북경대학 사회학과 수업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연령으로나 정신적으로 보면 문학 수업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육사의 문학 수업은 그의 독립운동과 더불어 그때 그때 감회를 시로 적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무렵의 시는 애국을 향한 현실의 고발이었다. 남들처럼 조용한 시간에 瞑想(명상)의 시를 쓸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의 문학은 순수문학이라기 보다 행동의 문학이었다. 육사시가 처음 시단에 보여진 것은 그의 나이 30세 이후였다. 1933년『新朝鮮』誌에「황혼」이 발표된 것을 필두로『개혁』,『조광』,『풍림』,『인문평론』,『문장』등에 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이 무렵에 쓴 시가 30여편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황혼」,「청포도」,「절정」,「광야」,「꽃」같은 작품은 名篇(명편)으로 우리 시사를 빛나게 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명성으로 이육사의 시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우리 시사에서 민족이 시로 빛나고 있다. 그의 많지 않은 시 32편 (한시 3편 제외)을 중심으로 그의 시문학 세계를 밝히고자 한다.
2. 이육사의 생애와 시세계
(1) 생애와 시의 발전
이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천리(遠村里)에서 아은(亞隱) 이가호(李家鎬)와 범산(凡山) 허형(許 )의 딸 허길(許吉) 사이에서 5형제 원기(源棋), 원록(源祿), 원일(源一), 원조(源朝), 원창(源昌)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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