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입 앞에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중국인들에게 서구 열강들 앞에서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모습은 매우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중국인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무엇인가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곳곳에서 조금씩 그런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중국의 근대화운동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첫째가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려는 양무운동이고, 둘째가 청조를 그대로 두고 제도 문물을 개혁하려는 변법운동이며, 그리고 셋째가 청조를 완전히 타도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혁명운동이다. 여기서는 이 구분에 맞추어 각각의 근대화 운동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양무운동
청조는 제1차 아편전쟁(1840~1842)과 애로우호 사건(1856~1860)을 계기로 하여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실감했으며 장기간에 걸친 태평천국운동(1850~1864)은 왕조의 존망을 위협했다. 그러나 청의 군사력은 이를 쉽게 제압할 수 없었기에 증국번과 이홍장을 비롯한 한인들이 지휘하는 향용에게 태평천국의 진압을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들의 활약이 커지면서 청조는 점차로 한인들을 중용하였다. 이들 한인관료를 중심으로 부국과 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의 근대산업을 일으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근대화운동이 추진되었으니 이것이 양무운동이다. 양무운동의 기원은 아편전쟁의 참패 당시에 쓰여졌던 위원의 《해국도지》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서양의 장기를 배워 서양을 제압해야한다(사이지장기 이제이)고 주장했다. 이것이 곧 양무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