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근대사 - 중국근대시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화보 작성 양무운동, 공친왕 이신
[동아시아근대사]
중국근대시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화보 작성“양무운동, 공친왕 이신”
이름 혁흔(奕訢). 호 낙도주인(樂道主人).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함풍제(咸豊帝)의 동생. 함풍제 즉위 뒤 공친왕에 봉해졌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에 육박하여 함풍제가 러허[熱河]로 피난하자, 연합군과 절충하여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전담관서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여 열강과의 화친을 꾀하였다.
1861년 함풍제가 죽고 6세의 동치제(同治帝)가 즉위하자 동태후·서태후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단행, 동치제의 측근인 이친왕(怡親王) 등을 제거하고, 동태후·서태후의 섭정 아래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군기처(軍機處)·총리아문의 대신으로 내치·외교의 최고권력을 장악하고, 증국번(曾國藩) 등을 채용하여 태평천국의 난 등 여러 내란을 진압하고 전통적 체제를 회복하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외에 평화가 회복되자 서태후로부터 경원되어, 1865년 의정당대신에서 물러나고 1884년에는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군기처대신이 되어 전쟁을 치르고 전후의 정국(政國)을 지도하였다. 시(詩)에 능하여 《낙도당시집(樂道堂詩集)》 《화금음(華錦吟)》 등을 남겼다.
[출처 공친왕 | 두산백과]
혁흔은 청나라 6대 황제인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그와 비슷한 넷째 아들 혁저(奕詝)와 함께 황자들 중 도광제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혁흔과 혁저는 어려서부터 늘 함께 공부하고 무예를 익혔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광제가 황위 계승자를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 두 아들을 놓고 차마 결정하지 못하고 엄청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 병이 심각해지자 비로소 두 황자를 불러들여 직접 대면한 다음 황위 계승을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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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해 서론
“저는요~! 이담에 자라서 훌륭한 대통령이 될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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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에서 초등학교 초반기의 아이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