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황해 평산 의병장으로 항일활동
․1911년 중국 관전에서 포수단 조직
․1916년 군자금확보위해 운산광산 송금마차 습격
․1918년 평양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은 1879년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주암면(舟岩面)에서 부친 영배(英培)와 모친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석대(錫大) 또는 운서(雲瑞)이며, 호는 기천(己千)이다. 대대로 명문이던 유림가문에 태어났으나 선생은 문무를 겸전(兼全)한 헌헌장부(軒軒丈夫)로서 박은식 선생도 천성이 질박하고 정직하며 의(義)를 존중하고 힘이 남보다 뛰어 났다고 선생을 평할만치 6척의 큰 키를 가진 기골장대한 호남아였다.
1894년 15세에 경서를 통달할 만큼 영특하였으며, 지(智)․덕(德)․용(龍)이 합일된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 갔다. 유인석의 문인인 사산(史山) 우병렬의 사위가 되어 유학에 정진하였으며 나아가서 의암의 제자로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바탕으로 한 항일 민족의식을 굳혀 갔다.
1905년 26세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향인 황해도 평산에서 장인 우병열(禹炳烈)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의 항전은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뿐 군사지식이 없었기에 뜻대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까지 그리고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져 혁혁한 무훈을 기록하였다.
선생은 전기(1894~1896)․중기(1904~1906) 의병항전때부터 각지의 의병장들과 기맥을 통해 오던 평산지역의 화서․의암계 유학자인 변석현(邊錫鉉)․채홍두(蔡洪斗)․박기섭(朴箕燮) 등과 함께 평산군 궁하면 <산두재>에서 기병을 논의한 후 깊은 산속인 도평산(桃坪山)에서 평산의병부대를 조직, 사방에 격문을 돌리자 여기에 향응하여 4~5천 명의 의병이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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