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 연구 리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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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시인 이상화
Ⅱ.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대한 해석
1. 상실된 조국에 대한 자기 자조와 통한의 마음
2. 조국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Ⅲ. ‘나의 침실로’에 대한 해석
1. 조국이 처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2. 남녀간의 애정을 소재로 한 아름답고 영원한 안식처 갈구
참고문헌
Ⅰ.시인 이상화
1901년생 1943년 사망.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출신,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백기만․이상백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나도향․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白潮》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 사건에 연류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 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1922)․<단조>(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 >(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