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천하의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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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천하의 갑신정변
3일 천하의 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 음력 시월 열이레의 둥근 달이 서울 전동(典洞)의 우정총국을 비추고 있다. 이밤, 느닷없이 치솟는 불길이 역사의 한 순간을 그을린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은 이날 밤 초대 총판(總辦·대표) 홍영식이 주최하는 낙성식 축하파티로 흥청거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정부 대신들이 각기 다른 꿈의 축배를 올리고 있다. 1876년 일본과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조선의 문에는 더 이상 닫아 걸수 있는 빗장이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영국·독일에 잇달아 문을 열었고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국교를 튼 그때의 조선은 지난달 칠레와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오늘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지금, 미군기지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용산이 바로 그해 8월 일본의 요구로 외국인을 받아들일 ‘자유 지대’(開市場)로문 열었던 것은 역사의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1883년 인천항을 개항하고 이듬해 봄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 케이블을 막 개통했을 정도로 조선은 급박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었지만, 정작 나라를 어디로 끌어갈지에선 개화당과 수구당이 ‘속도’와 ‘폭’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반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 상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 전인 1882년 말의 일이었다. 근대의 빛은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 1883년 말, 미국 방문 길에 나선 민영익과 개화파 일행이 일본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했던 이들은 일년 뒤 개화의 속도와 방법론을 놓고, 동지에서 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서광범·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유길준이 보인다. 앞줄에 보이는 어린이는 당시 게이오 의숙에 유학 중이던 박용화다.

“군(君)은천(天)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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