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온통 초록이 짙게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 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 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던 것이 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다.
야들야들 나부끼는 초록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 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울률이라고나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 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꽃 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 가지 풋나물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만 같다.
새가 지저귄다. 꾀꼬일까.
지평선이 아롱거린다.
들은 내 세상이다.
2
들에 찾아 온 봄을 찬미하여, 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 를 뱅뱅 돌 뿐이요, 조화 속의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 싶다. 초록풀에 덮힌 땅 속의 뜻은 초록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들을 밥과 책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은 들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벗하게 됨은 생활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까. 식물적 애정은 반드시 동물적 열정이 진한 곳에 오는 것일까 그러나 동무들과 골방에서 만나고 눈을 기어 거리를 돌아치다 붙들리고 뛰다 잡히고 쫓기고 -- 하였을 때의 열정이나, 지금의 들을 사 랑하는 열정이나 일반이다. 신념에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라고 인간 이상이 아닐 것과 같이 들을 사랑하는 졸부라고 인간 이하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퇴학 맞고 처음으로 도회를 쫓겨 내려왔을 때에 첫걸음으로 찾은 곳은 일가집도 아니요, 동무집도 아니요, 실로 이 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