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보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출생으로 서울 종로구 필운동 야 조현 고가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자는 주상(周相)이고 본관은 파주(坡州)이다. 모친은 경주 김씨이며, 본명은 상섭(尙燮), 필명은 상섭(想涉), 횡보(橫步), 제월(霽月)이다. 8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는 1907년 11세에 관립 사범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관립 사범학교에서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또 이등박문이 오는 날에는 전체 학생을 참가시키고 황제의 동적전 거행에는 반 대표만 보낸 것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이기봉, 최승만 등과 함께 보성 보통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1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고, 1912년 9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미 맏형 창섭, 둘째 형 명섭이 일본에 유학중이었다. 창섭은 유년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6개월간 일본어를 배웠다.
1915년 19세에 경도부립 제이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외국인으로는 유일한 학생이었으며 「우리집 정월」로 문장력의 칭양을 받기도 한다. 이때 맏형 창섭이 경도 주둔 제 16사단에 육군 중위로 근무하고 있있다.
1918년 2월 맏형 창섭이 이웅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게 됨에 따라 동경유학생회에서 집단 항의를 하기도 한다. 3월에 경도부립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족 자제가 다니는 경응대 문과 예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한 학기만 마치고 10월 8일 병으로 자퇴했고,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여 대판 조일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냈다.
1919닌 1월 『삼광』(三光) 동인이 되었다. 대판에서 국내의 3․1 운동 소식을 듣고 유학생 등을 규합하여 3월 19일 대판 조선노동자 일동대표 명의로 대판 천왕공원에서 거사하기로 했으나 3월 18일 밤에 피검된다. 대판 지방법원에서 금고 10월의 판결을 받았으며 6월 6일 무죄 판결을 받고 6월 10일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대판 조일신문 주필에게 어째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라는 글을 써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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