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선 채규섭과 조우섭의 7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임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그전 6, 7세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친이 부농이었기 때문에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즉 3․1운동 전후에 그는 중앙고보에 다녔는데 3․1운동과 관련한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 없다. 1920년에 결혼하였고 1922년 도일하여 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해 축구부 센터포드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관동대진재로 인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1924년 단편 「세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것은 이광수가 추천하여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5년 이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시대의 대부분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여러 신문, 잡지사의 기자로 전전하다가 1936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창작생활에 전념하였다.
해방 직전 낙향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가 다시 낙향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11일 평소부터 앓아오던 폐병으로 전북 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자라는 직업에 오래 종사했기에 이 직업을 통해 채만식은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 그리고 비판적․진보적 현실관과 역사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민족과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을 작품의 중심 제재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가난의 체험을 들 수 있는데, 성장기와 달리 동경에서 귀국한 후로는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인 난관을 겪었다. 부친이 군산에서 미두에 손을 대었다가 몰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방황하는 인텔리상, 미두로 몰락하는 지주의 모습, 그리고 도시 및 농촌 빈민상은 곧 그의 가난에 대한 체험의 산물이다. 그리고 셋째 형과 넷째 형은 금광에 투자하였다가 망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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