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신문」에 1948년 1월 1일에서 11월 3일까지 200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염상섭의 장편 『효풍(曉風)』은 작가 한 몸에 내외로 얽힌 창작 여건이 심상치 않았던 때의 산물이다. 본인이 자초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염상섭은 이 작품을 심사가 산란한 가운데 썼다. 그러기에 염상섭은 이 작품을 독자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닫아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염상섭은 해방 이전의 마지막 장편소설 「불연속선(不連續線)」 (「매일신보」, 1936. 5. 18~12. 30)을 연재한 지 10년도 넘는 1948년도에 『효풍』을 써서 대표적인 장편소설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효풍』 이후 생전의 마지막 장편 「대를 물려서」(1958~1959)까지 그는 매년 한 편씩의 장편소설을 써내었다. 해방 이후의 염상섭의 발표작들이 대체로 문학사가들로부터 부정적 평가나 무관심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반해, 장편 『효풍』과 단편 「삼팔선」, 「이합(離合)」, 「그 초기」, 「재회」 등의 1948년도 발표작들은 모두 작가 개인의 차원에서나 문학사적 차원에서 문제작의 반열에 든다. 염상섭 개인에게 1948년은 「삼대」가 발표되었던 1931년에 이어 또 하나의 절정의 시간이 된다.
염상섭은 신민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자유신문에 『효풍』을 연재하였는데, 신민일보가 5․10 선거에 임박하여 5․10 선거의 민족통일 방해의 성격을 이유로 공격하자 미군정은 편집국장 염상섭에게 책임을 물어 일주일간 구류를 살게 하였다. 그후 신민일보는 다른 신문들과 함께 5월 26일에 폐간되고 말았다. 염상섭이 필화 사건으로 인한 구류라든가 신문 폐간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민족통일정부 설립이요 좌우합작이었을 것이다. 염상섭이 나름대로 적극적 의미의 중립적 이데올로기를 포회하지 않았더라면 『효풍』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