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동제사 조직(중국 상해)
․동아일보 등 논설위원으로 국혼환기
․1948년 초대 감찰위원장 역임
․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 사망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일제(日帝)의그 혹독한 탄압속에서도 「五千年間 조선의 얼」을 집필하여「얼」만이 眞이요 實이라 하시며, 一言,一事,一行,一動이 깡그리 骨子가「얼」이어야 한다고 「얼思想」을 강조하여 民族精神을 깨우친 爲堂은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으며 붓과 펜으로 일제와 싸우며 국학(國學)보급과 민족문화 앙양에 일생을 바쳤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 17세에 양명학을 깨우치다
선생은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鍾峴)(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간조(鄭間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독자로 태어나 후손이 없는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능숙하고 재기가 넘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자라났다.
1910년 17세 때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난곡 이건방(蘭谷李建芳) 선생으로부터 한국화한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본명은 인보(寅普)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경업(經業)이라 하였다. 자(字)는 경시(京施)라 하고 호(號)는 위당(爲堂)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기지 건설자금으로 지원하다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성 회인현 흥도촌(懷仁縣興道村)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하는데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 형제를 만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땅 4백~5백 석거리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 등 이회영 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