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1세) - 1월 16일(음력 전해 12월 18일)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탑동 211번지에서 김종호(金鍾湖)씨와 김해 김씨 사이에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 윤식(允植), 아호 영랑(永郞).
1909년(7세) - 강진보통학교에 입학. 1915년(13)에 졸업.
1916년(14세) - 모친의 도움으로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
1917년(15세) - 휘문의숙에 입학.
1919년(17세) -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진에서 의거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1920년(18세) - 도일(渡日)하여 아오야마학원(靑由學院) 중학부에 적을 둠. 혁명가 박열(朴烈)과 갖은 방에서 하숙, 용아 박용철(朴龍喆)과 사귐.
1921년(19세) - 성악 공부를 뜻하였으나 부친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시 귀국.
1922년(20세) -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 입학.
1923년(21세) - 여름방학에 귀국했다가 동경 대진재(大震災)로 학업을 중단.
1930년(28세) - 박용철․정지용․이하윤․정인보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여 3월에 잡지 <시문학> 창간, 여기에 『동백잎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4행 소곡 7수』외 3편을 발표. 이후『고흔 봄길 우에』외 8편, 『내 마음 아실 이』외 6편을 <시문학>지에 발표.
1934년(32세) - <문학> 창간호에 『4행 소곡 6수』 발표.
1935년(33세) - 『영랑시집』을 박용철의 도움으로 간행.
1945년(43세) - 해방과 더불어 고향인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 이후 대한독립 촉성회에 관여하고 강진 대한 청년단 단장을 지냄.
1948년(46세) - 서울 성동구 신당동 290의 4로 이주.
1949년(47세) - 공보처 출판국장을 7개월간 역임. 10월, 『영랑시집』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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