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李會榮)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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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李會榮) 선생
이회영(李會榮) 선생
1867. 3. 17~1932.11.17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우당 이회영(友堂李會榮) 선생이 선정됐다. 백사 이항복(白沙李恒福)의 10대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명문세가(名門世家)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나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思考)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선생을 독립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되는 것은 더욱 타당하다. 선생은 정치․외교․군사․교육․언론 등 모든 부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의 높은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中央日報)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피압박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大連水上署留置中
怪!縊死한老人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죽은 리상한 로인』
이같은 기사는 즉각 확인되지 않았다. 간악한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 『그 노인이 이회영(李會榮)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 1년뒤…일경(日警) 고문으로 순국

그러나 며칠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생이 유치장 안에서『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고문에 의해 순국해Tdau 일제에 의해서 서둘러 화장까지 되었다.
일(日)군국주의 서곡인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지 1년만의 일이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조선조 명문대가(名門大家) 이항복 10대손 이시영 초대부통령의 형님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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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