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名을 寀浩, 나중에 采浩로 고쳤으며,
雅號는 一片丹生, 丹生, 丹齋,
筆名으로 無涯生,錦頰山人,한놈,熱血生,劍心,赤心,燕市夢人,
假名으로 尹仁元,王兆崇,劉孟源,朴鐵,王國錦 등을 쓰기도 함.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민족수난과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광복운동 시기의 인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가능한 방도를 모두 시도해 본 가장 전형적인 항일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1. 朱子學徒(1880 - 1905)
충남 대덕에서 가난한 농촌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서 漢 文을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무척 영민하여 9세에 '資治通鑑'을 마치고 13세에는 四書三經을 모두 독파하고, 16세(1895)때에는 이미 朱子學에 대해서는 대인으로 성숙된 감이 있었다고 한다. 19세 때에 는 守舊派의 大臣인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成均館에 입학하였는데 성균관에서도 탁월하여 동료들을 감탄케 했으며, 이때의 스승 수당 이종원(遂堂 李鍾元)은 申采浩에 대하여 '나를 알아주는 자는 오직 君 한사람뿐이다-知我者 唯君一人'이라고 公言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1905년 성균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개화파로서 獨立協會의 萬民共同會에 참가하여 내무 부, 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다.
2. 愛國啓蒙活動家(1905 - 10)
張志淵,朴殷植 등이 주도하는 皇城新聞에 들어가 논설기자로 활약했으며 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일했다. 이즈음 그는 新民會에 가입하여 비공식 대변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민족과 조국이 위기 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에 관한 전기를 번역, 저술하였다.
27세 때(1907년)에 이동녕, 이회영, 양기탁,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취지문을 기초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논설로서 이를 고무하였으며, 1908년에는 국사연구로 독사신론 과 대한의 희망등 민중계몽에 대한 간단한 논문을 발표하고 기호흥학회에 가입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