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于 이장녕(李章寧)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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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白于 이장녕(李章寧) 선생
1881. 5. 20~1932. 1. 24)

․1910년 신흥강습소 교관(중국 유하현)
․1919년 북로군정서 참모장
․1924년 신민부 참의원
․1932. 1월 순국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대한제국 육군부위로 복무하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중국 유하현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자건설 및 독립군양성에 힘썼으며, 1911년 군정부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이후 북로군정서․대한통의부․신민부 등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핵심 간부로서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투쟁에 일신을 돌보지 않았던 선생은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토비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51세였다.

대한제국 육군부위로 군대가 해산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헌신

선생의 휘(諱)는 장녕(章寧)으로 일명 장영(長榮)이라 하였으며 호(號)는 백우(白于)이다.
1881년 5월 20일 충남 천안군 목단면 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하여 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하였다.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황실 친위대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가재(家財)를 정리하여 가족과 함께 1907년 11월 20일 중국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하여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되었다.
그뒤 뒤따라 온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이회영(李會榮) 형제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힘스고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여 선생은 교관으로서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북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올리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서일(徐一) 선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軍政府)(일명 大韓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 지위를 갖추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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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