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삶과 이립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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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삶과 이립의 의미
공자의 삶과 이립의 의미 (而立)

초창기 공자의 학문은 오늘날의 고증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공자의 진술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라의 예에 관해 나는 능히 말할 수 있지만 기杞나라에 관해서는 고증이 부족하다. 은나라의 예에 관해 나는 능히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에 관해서는 고증이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만 충분하다면 나는 능히 그것을 고증할 수 있다.”〈팔일〉

이처럼 과거 시대의 각종 전통과 제도에 대해 보여준 공자의 관심은 책상물림 수준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태묘太廟―주나라의 개국공신이자 노나라의 시조였던 주공의 무덤―에 자주 들러 관원들이 귀찮아 할 정도로 제례에 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27세가 되던 해에는 노나라를 방문한 담郯나라의 자작子爵을 찾아가 고대 관제에 대해서 가르침을 구한 예도 있었다. 문헌이 될만한 것이 있다면 어디든 직접 발품을 팔고 다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쌓은 지식은 가히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훗날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물 때의 일이다. 진의 민공湣公이 독특한 화살에 맞아 떨어진 새 한 마리를 공자에게 보내 그 출처를 물었다. 살은 싸리나무로 되어 있고 화살촉이 돌로 된 것을 보자, 공자는 그 화살이 옛날 숙신국肅愼國(지금의 만주 길림성)에서 주무왕에게 헌납한 것이고, 무왕이 다시 진나라를 비롯한 각 봉건국에 하사한 ‘고시석노楛矢石弩’라고 유래를 밝혔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민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공자의 식견에 탐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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