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한용운에대하여

1. 시인한용운에대하여.hwp
2. 시인한용운에대하여.pdf
시인한용운에대하여
시인 한용운의 개요

1. 들어가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승려였던 한용운은 아명은 유천(裕天),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or 卍海)였다.
충남 홍성군 경성면 성곡리에서 옹준의 차남으로 출생.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 1896 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여기서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에 접했다. 특히 중국의 선각자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조선불교유신론과 승려로써의 한용운

1901년 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며 견문을 넓히고 귀국,안변 석왕사에서 참선하다가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 1905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토쿄,교토,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3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만주의 교포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도만했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외심을 받아 총격을 당해, 이것이 만성 요두증의 원인이 되었다.

이 무렵 친일 승려 이 희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고 돌아오자 그는 이에 분개,1911년 박한영등과 승려대회를 개최,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데 성곡했다. 한편 넓은 견문과 근대적인 지식을 터득한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와 운든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 한 대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 ,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불교의 구세주의 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 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