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럽 대륙 철학계에 하나의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 현상은 '주체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다. 심각한 환경 문제를 초래한 과학 기술에 대한 불신, 인간의 합리적 대화와 의사 결정 능력에 바탕한 민주주의의 위기, 삶의 전영역의 공공화를 통한 개인적 삶의 파괴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간 주체의 절대화에 있다고 보고, 이러한 절대화된 주체는 이제 더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마치 '신의 죽음'이 니체 한 개인을 통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듯이 '주체의 죽음'도, 만일 주체도 죽었다면, 그렇게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그것은 헤겔 이후, 포이어바하, 맑스,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를 거치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예고된 사망이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사망 소식이 들려온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자문해 볼 때, 죽었다고 얘기되는 그 주체를 확인하기가 그렇게 쉽지 만은 않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숨'의 주체인가, 아니면 칸트의 '초월적 통각'의 주체인가, 아니면 헤겔의 '절대 정신'의 주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떤 주체인가 우리가 처한 상황을 헬러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錚* 사람을 땅에 파묻기 전에 먼저 그가 누군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장례 직후에 다시 시체를 끄집어 내는 번거러운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철학도들은 이제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체'라고 불리우는 것 혹은 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부검을 실시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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