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만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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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만인보
고은의 ‘만인보’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부여땅 몇 천 리/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만남이여/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이 오랜 땅에서/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고은, <만인보> 서시).

고은(63)씨는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를 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서 구상했다. 그해 5월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처와 동시에 체포된 시인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창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탈출구로 삼았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제1연)고 선동했던 그가 80년 5월 광주를 통과하면서 <만인보>의 세계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는, <만인보>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70년대를 특징짓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찾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보>를 권력에의 투항이나 현실 순응으로 보는 시각 역시 맹목과 단견으로서 타기되어 마땅하다. 그보다는 싸움의 역사로부터 견딤의 역사로, 화살의 세계관에서 장강(長江)의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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