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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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자겸(李資謙)의난(亂)과 묘청(妙淸)의난(亂)

고려사회는 12세기에 들어와서 동요하는 모습이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지방에서는 군현제하 속현(屬縣)과향(鄕)·부곡(部曲)·소(所) 민이 유망 저항하였으며, 중앙에서는 지배계층 사이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폭발하여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두 난은 지배층 상호간의 갈등을 공동의 기반으로 하면서도, 전개 지역과 참여한 주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고려사회가 안정을 보이면서 최고급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누대에 걸쳐 중앙관직에 진출하였으며, 한정된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경원이씨(인주이씨) 경주김씨 파평윤씨 철원최씨 해주최씨 남평문씨 강릉김씨 평산박씨 등은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이었다. 그 가운데서 인주이씨는 문종대부터 인종대까지 80여년 동안에 5명의 왕에게 9명의 왕비를 들여 외척으로서 당대의 최고가문으로 득세하였다 [자료4]. 나아가 왕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권력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왕실 및 다른 귀족들과 충돌이 잦았다.

문벌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국왕 위치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어 예종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사학(私學)을 누르고 관학(官學)을 키우기 위해 국학에 7종의 전문강좌인 7재(齋)를 설치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세워 학비를 보조하였고, 청연각(淸燕閣)을 세워 경서(經書)를 강론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진세력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왕권을 어느 정도 안정시켜, 인주이씨를 비롯한 문벌귀족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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