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부가 공산당에 의해 패퇴했다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다. 국민정부는 집권이래 광활한 중국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보는 쪽이 더 옳다는 것이다. 각 성으로 분할되어 통치되는 시기에 중앙정부의 힘은 地方勢力들을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였고 집권 초기에 당장 그들의 영토를 늘이는 표면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확실한 무엇을 이루는 것은 허술하게 취급했던 것이다.
이는 蔣介石정권의 방법에 있어서의 미진한 면도 있지만 각기 지방에 근거를 두고있는 군벌세력들의 저항과 술책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항일전쟁 시기에는 수도를 계속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항전했지만 전쟁전의 政治的 聯立關契에 있던 많은 군벌들이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민정부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나라에 쳐들어온 일본군 보다 더 커다란 적으로 국민정부를 규정해 버리는 등의 二律背反的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 것도 위와 같은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꼭 모든 군벌이 중앙에 배타적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귀주(貴州)나 절강(浙江)같은 省은 중경의 중앙정부에 매우 충성스러운 편이었다. 광동(廣東)의 경우도 비록 관할 사령관의 충성은 오락가락 하였으나 신임 받는 성주석이 있어서 견제가 가능했다. 여기서 주목하여 살펴볼 곳은 바로 운남(雲南)이다. 초기에는 중앙정부에 매우 우호적인 지역중 하나였으나 항일전쟁 말기에 가서 양자간의 관계는 매우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초기 운남은 지리적으로 베트남과 인접해 있어서 문화적인 혜택과도 거리가 멀고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미약한 편이었다. 그리고 雲南人의 성격도 오랫동안 고립의 영향으로 중앙에 매우 배타적이며 감정적인 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