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중국과 오늘의 중국사이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커다란 골이 존재한다. 이는 ‘문화 대혁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오늘의 중국 대륙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966년 5월에서 76년 10월에 걸쳐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문화대혁명은 정치적 성격을 띤 문화운동으로 ‘문혁’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문혁은 그 발발 과정부터, 경과, 종말이 거의 밝혀졌다. 한동안 중국인들은 이 역사적인 세월을 기억해서 되살려내는 것을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당시 문혁의 중추세력이었던 10대 중반의 홍위병(紅衛兵)[1]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이제 중국의 각 조직 책임자급으로 성장해 있지만, 그들의 한때가 황폐했던 만큼 지도력의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큰 역사적 공백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0억 인구가 정말 바보같이 휩쓸린 일종의 광풍을 10년간 지내며 중국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 졌다. 중국의 온갖 역사적 유물 등은 불살라졌다. 교수란 직업이 멸시 당하였고, 대학교육은 10년간 사라진다. 어른이 아이에게 수염을 뽑히는 등 정상적인 국가운영체제는 무너지고, 오직 모택동(毛澤東) 일인의 가치체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2. 문혁 이전의 중국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나자 중국은 통일국가의 건설이 가장 중대한 과제로 등장했다. 전쟁 이후에는 장개석 정부가 미국의 원조 덕분으로 공산당보다는 훨씬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군의 유격전과 정치공작, 국민당 내분과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정책 부재, 인플레로 인한 군 사기의 저하 등은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어주고 1949년 대만으로 달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침내 주석으로 선출된 모택동은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