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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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
남경대학살

1.서문
남경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이고, 11년간 태평천국의 도읍지였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둔 곳이기도 하다. 훗날 남경대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한 고성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남경대학살에 대해 언론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의 1930년대 상황을 수업시간에 배우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사건에 대해 이 일이 중국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에도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 특히 우리 나라에서도 영향을 받게됨으로써 일어난 결과도 알아보고자 함이다.
1937년 여름 노구교(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단추를 연 일본 군은 파죽의 기세로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을 거쳐 11월 상하이(上海)를 점령했다. 그들의 다음목표는 장제스(裝介石)국민당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던 난징(南京)이었다. 9만명의 일본군이 양쯔(陽子)강 남한의 이 도시를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자 총통 장제스는 성 함락 5일전 정부 를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퇴각했다. 잔류해 있던 약 70만명의 난징 시민과 군인들은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타고 넘어온 일본군들을 앉아서 맞았다.
난징 점령 초기 6주일간 일본군은 무기력속에 빠진 중국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을 극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백기를 든 군 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훈련 혹은 '목베기 시합'의 대상물 로 삼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다. 사람을 산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연료를 쏟아부은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당시 난징 잔류인구의 절반 가까운 약 30만명에 이르렀다. 미국 새너제이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 (抗州)의 3백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천 2백톤, 시체는 기차 2천 5백량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치를 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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