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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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
같은 현실과 다른 이상, 독립운동에서 건국까지

1. 들어가면서
영웅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사고는 19세기의 낡은 유물이 된지 오래이다. 지배자의 역사에서 피지배자의 역사로, 정치사에서 생활사․문화사로 역사서술의 중심이 이동되고 있는 현실이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왜 다시 이승만, 김구를 이야기하는가
2,000년대에 들어서도 한반도는 여전히 해결해야할 민족문제를 안고있는 지구상 최후의 냉전지대로 남아있다. 때문에 무거운 주제이긴 하지만 현실의 민족문제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본 발표에서는 일제하의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건국․통일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로 한국근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두 인물의 비교를 통해, 현실의 민족문제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역사란 결국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2. 성장과정: 공통점과 차이점
1) 신분적 배경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7대 손으로 왕족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보학(譜學)에 능한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족보에 대한 교육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해방후 미군정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었던 버치가 이승만을 부르봉파로 평가한 것이나1)1) 부루봉 왕조의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절대군주였다.
그가 미국에서의 대학시절 왕족으로 행세한 것은 이러한 신분적 우월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구는 상민 출신으로 양반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는 양반이 되고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1926년 12월에 그가 이동녕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 취임 교섭을 받고 일단 사양한 이유로 첫째로 든 것이 자신 같은 미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일국의 수반이 된다는 것은 국가[임시정부]와 민족의 위신에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전통적 유교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 학문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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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