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1. 서론
7년간에 걸친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또 다시 조선은 북방 후금의 침입을 받았다. 그것은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이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두 사건이 일어나 후금을 자극하였다. 그 하나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을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조 반정 후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구실로 하여, 조선 인조 5년(1627)에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2. 본론
한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대동법을 강원도에까지 확대 실시하였고 1626년(인조4년)에는 광해군 4년에 폐지되었던 호패법을 다시 실시하였다.
한편 인조반정을 성공리에 이끈 서인들은 조정에서 대북파들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남인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조정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일찍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철회하고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후금에서는 제 1대 황제인 누르하치가 죽고 그의 아들 홍타이치가 등극하여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홍타이치(태종)는 원래부터 조선과의 화친을 반대하였는데 조선이 친명배금정책을 펼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조선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만인 1627년 1월 그동안 호시탐탐 내침을 노리던 여진족이 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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