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옛날 귀거래사의 시인은 '새는 날다 고달프면 돌아올 줄을 안다'고 읊었고, '영원의 청춘'을 누리던 괴테도 서른 한 살의 젊 음으로써 이미 '모든 산봉우리에 휴식이 있느니라'고 노래하였거니와, 이것은 그들이 남 유다른 직관과 감수력으로 향수의 구슬 프고도 깊은 의미를 몸으로써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서 자란 나는 그리워 할 아름다운 고향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마음이 고달플 때면 달려갈 고향같은 기억이 있다. 창랑정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다.
창랑정은 대원군 시대에 이조판서 벼슬을 지낸 나의 삼종 증조부 '서강대신'이 쇄국의 꿈이 부서지고 대원군도 세도를 잃게 되 자 벼슬을 내놓고 서강의 별장을 사서 창랑정이라 이름 붙인 후 우울한 말년을 보냈던 정자의 이름이다. 내가 처음으로 창랑정 을 갔던 것은 일곱살 쯤의 이른 봄날이었다. 그곳에서 며칠동안 지낸 기억이 이상스럽게도 어린 머릿 속에 깊이 새겨져서 거의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가끔 내 추억 속의 향수가 되어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창랑정을 찾았을 때 서강대신은 병석에 누워 계셨다. 그는 그때 나이 벌써 팔십이나 되고 오랜 병석으로 무척 수척했으나 어린 내 마음에도 갖은 풍상을 다 겪은 귀인의 풍모같이 보였다. 서강대신에게는 증손자 김종근이 있었는데 그 는 대를 이을 유일한 자손으로 애지중지 사랑받고 있었다. 서강대신은 그 종근을 신식 학교에 보낼 것인가에 대해 아버지와 상 의했던 것 같다. 신식 개화에 대해서는 멀고 가깝고 간에 집안에서 나의 아버지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뒤에 들은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서강대신은 달라진 세상 탓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손에게 신식 공부를 시킬 필요를 느끼고 아버지와 의 논을 한 것이었지만 끝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해 종근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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