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답하려고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의 시대적 관점을 반영하고, 또 그 대답은 우리가 현재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더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답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우리의 연구 주제가 중요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이와 같이 광범위하고 중대한 문제를 꺼내어 주제넘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사실이란 감각적인 인상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의 관찰자에게 부딪쳐 오는 것이며, 따라서 관찰자의 의식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것을 받는 과정은 수동적인 것, 다시 말해서 주는 것을 받은 뒤에 관찰자가 이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중사전(中辭典)]은 편리한 대신 경험주의 학파의 선전서 구실을 하고 있는 책인데, 사실이란 [추론과는 전혀 다른 경험의 소여(所與)]라고 정의함으로써 두 과정이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상식적인 관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역사란 확인된 사실의 집성(集成)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된다. 생선을 생선 가게에서 사는 것처럼 역사가들은 문서나 비문(碑文)속에서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역사가는 사실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조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을 식탁에 내는 것이다.
리튼 스트래치(Lytton Stratchey ; 영국의 전기 작가. 1880-1932)는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지(無知)는 역사가의 첫째 조건이다. 무지는 단순하게 만들고, 명료하게 만들고, 선택하고, 버린다.] 이처럼 역사가가 문서를 연구하여 해독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사실이라는 것은 문서에 실려 있건 없건 역사가의 손으로 처리되어야만 비로소 역사가들이 쓸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