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책은 역사학 초심자들에게 읽히면 절대로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전공하고 있는 영역인 사회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 사람들을---그것도 특히 초심자들을---유혹하여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어온 책이 있는데, 이름하여 사회학의 초대라고 현상학자인 P. 버거의 책이다. 이 책은 버거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마 읽는 것 자체도 힘들겠지만, 정규적인(orthodoxical) 사회학 수업(修鍊에 가까울 것이다)을 받게 되면 이 책이 제공한 시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에 대해 정이 떨어져버리고 만다.
이와 유사한 책이 역사학 분야에도 있으니 바로 지금 서평을 쓰려는 책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범우사, 1977, 황문수 譯)이다. 역사학에 처음으로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을 꼽으라면 나는 제일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를 꼽겠다.
이 책과 나는 인연이 깊다. 이 책을 처음으로 통독하였던 1993년도 1학년 겨울방학을 잊지 못한다. 그 수많은 책들---전에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나는 사회학과에 입학해서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남독(濫讀)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책이었다---가운데 단연코 휘황찬란한 광채를 뿜던 이 책과 A. 스윈지우드의 사회사상사는 나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그 감상이 다르다. 그러나, 나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이 책은 나에게 M. 베버의 ‘추체험(追體驗)’과 ‘이해(verstehen)’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