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은 높이 7백~9백m대의 산들로 옴팍하니 둘러싸인 분지형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남상면을 지나 거창읍으로 통하는 북쪽으로는 신원면의 상징과도 같은 감악산(951m)이 버티고 있고, 산청군 오부면 및 차황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남쪽에는 보록산(800m)과 소룡산(779m)이, 그리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각기 월여산(863m)과 갈전산(764m)이 절집의 사천왕처럼 신원면을 지키고 있다. 분지 너머로 시야를 뻗으면 남서쪽의 지리산과 북동쪽의 가야산, 그리고 북서쪽의 덕유산에 이를 테지만, 신원의 사천왕들은 그같은 시야의 확장을 가로막고 나선다. 사천왕들이 가로막는 것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향하는 시야만은 아니어서, 신원면 밖에서 보면 높직한 산과 깊숙한 골짜구니가 눈에 들어올 뿐 그 안에 아기자기한 마을과 논밭들로 이루어진 분지가 자리잡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다. 예로부터 천분과 소여에 만족하지 못하는 중생들은 감악산을 끼고 도는 숭더미재나 소룡산을 빗겨 나가는 밀치재를 통해 분지 너머로의 출타를 도모해왔다.
그러한 사왕의 위요와 영검으로써도 이념의 차이로 인한 인간의 광기와 맹목은 물리칠 수 없었음인가. 1951년 2월11일 신원면의 분지 안에서는 총성과 비명, 초연과 선혈이 뒤섞이고 교차하면서 아수라의 지옥을 연출한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들이 신원면 대현․중유․와룡리 주민 6백여명을 집단학살한 것이다.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이 포함된 비무장 양민을 청소'한 까닭은 그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것이었다. 국군의 주장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950년 12월5일 4백~5백명의 빨치산이 신원면 양지리의 분주소를 습격, 점령한 이후 다음해 2월7일 국군이 신원면에 진주하기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군이 다시 들어올 무렵 빨치산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군쪽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