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국제결혼의 시초는 한국전쟁 후 미군과 한국인 여성들과의 결혼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 다수는 가난 때문에 어떨 수 없이 미군과 결혼하였다.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역사적 ․ 사회적 배경 때문에 국제결혼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국제결혼의 다수가 기지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결혼은 매춘과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농촌 사회는 모든 면에서 개발과 발전으로부터 배제 되어왔다. 다시 말하면 농촌은 도시에 빨려 들어 간 것 이다. 그렇게 빨려 들어 간 것은 돈과 젊은이들. '서울드림'을 쫓아 서울로 올라간 젊은이 들이 떠난 자리엔 고된 농사일과 부모를 봉양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60년대 수준을 면치 못하는 베트남 필리핀의 저개발 국가에는 그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 시켜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들이 있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면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결혼 중매자의 말을 듣고 여성은 무작정 짐을 싸 한국으로 왔다. 그 여성들은 결혼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탈출구로 여기고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심지어 상대 한국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매매혼’을 선택했다. 아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독일로 흘러 들어간 터키인이나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와 형태만 달랐지 내용면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코리안 드림' 을 안고 한국으로 날아온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경제적 안정은 커녕 상습적인 폭언, 폭행과 인종주의적 차별이었다. 이상이 우리나라 농촌에서 일어나는 국제결혼의 개괄이다.
Ⅱ. 국제결혼의 실태
권씨의 아내는 레티김흥(24). 베트남 출신이다. 이방인끼리인데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은 여느 부부들과 다르지 않다. 가끔씩 티격태격 말싸움도 벌이고 돌을 앞둔 아들 혁영이의 재롱을 지켜보며 오순도순 사는 ‘보통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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