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시집을 몇 십만 부 찍을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 서점과 신문사에서 매달 시집 베스트 셀러 순위를 따로 매기는 나라도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해마다 출간되는 시집의 종수도 엄청나지만 한두 해에 10판 이상을 찍는 시집도 상당수 출간된다. 서정윤의 홀로 서기를 필두로 하여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시집도 여러 권이니 우리 나라는 시인의 왕국, 시의 나라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적 화려함이 문화의 전반적인 성숙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상업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시집이 많다고 하여 국민의 시에 대한 사랑의 체감온도가 홀로 서기의 성공과 더불어 갑자기 뜨거워지고 그 뜨거움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시집의 상품화 성공과 시집이라는 얇은 책자의 고부가가치가 시의 향기를 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향기를 악취로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해왔는데, 이는 일시적인 우려를 너머 문학적 불행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이 그레샴의 법칙이다. 독자 대중에게 널리 읽혀지는 시가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는 시를 구축하고 있으므로 그레샴의 법칙에 따르면 영상매체 무소불위의 이 유치찬란한 시대에 질 낮은 시집의 상품화는 막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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