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정배경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노령에서 창해청년단 사령장, 수청고려의병대 사령관으로 백군과 마적을 소탕하고, 고려혁명군사령관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선정.
2. 주요공적
○ 1919년 일본군을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
○ 1920~22년 노령에서 창해청년단 사령장,
수청고려의병대, 한국 의용군 지휘
○ 1922년 고려혁명군 사령관으로 항일 무장투쟁
김경천(金擎天) 선생
(1888. 6. 5 ~1942. 1. 2)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현역 일본군 중위로서 후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3․1운동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세인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서간도 지역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이청천, 신동천(申東天)등 3인과 함께 남만주 3천(三天)으로서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무기구입을 위하여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에서 창해청년단(일명 창해소년단),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 등에서 활동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장군은 러시아 내전이 끝난 다음에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일원으로 참석하는 한편 이에 실망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온 이후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설립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 국내에 진공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즉 장군은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1922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시까지 러시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22년 시베리아를 방문한 공민 나경석(羅景錫)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5) 1922년 1월 24일자 중 「경천 김장군」이라는 제목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