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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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忠正公 조병세(趙秉世) 선생
1827. 6. 2~1905. 12. 1

․1896년 19개조 시정개혁안 상소
․1905년 을사조약무효와 5적처단 요구 상소
․1905년 자결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선생은 1827년 6월 2일 홍천현감을 역임한 조유순(趙有淳)과 대구서씨를 양친으로 서울 회동(會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齊)이다.
조선 경종조 노론 4대신 중한 사람이었던 조태채(趙泰采)가 선생의 6대조이고, 5대조 관빈(觀彬)은 관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백부 조두순(趙斗淳)은 고종조에 영의정을 역임한 명문벌족(閥族)이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주요 관직을 역임하다

이와 같은 가정환경은 선생에게 일찍부터 관계진출의 뜻을 갖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6세 때인 1852년 음직으로 관계에 나아간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 헌납, 홍문관 교리 등 조선시대 관계에서 흔히 대쪽같은 선비들이 거치는 삼사(三司)(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로서 관리의 부정부패를 규찰하거나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직책)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감사원이나 언론계통의 직책이다.
철종이 승하한 뒤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정권교체기에도 선생은 여전히 사헌부의 장령, 집의, 부교리, 사간원 사감, 집의, 응교, 홍문관 부응교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1865년(고종 2년)부터는 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우부승지에 오르는 등 권력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866년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대원군의 섭정이 강화되면서는 이천부사, 영광군수 등 외직으로 물러나 중앙관계에서 멀어지기도 하였다. 지방의 수령으로 재직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부정부패를 없애고 서민들의 생활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선생이었지만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는 다시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여 애민위국(愛民爲國)의큰 뜻을 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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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