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왕 7~9년 (1281~1283) 一然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 삼국유사는 당시 고려 중기에 들어오면서 문신귀족세력은 왕도중심 중앙귀족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지방사회세력의 정치 참여를 거부하는 독선을 자행하였다. 여기에 한 몫을 더해 유교적 정치이념의 전제화로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의 괴리가 보다 크게 초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괴리로 지배체제 내의 반목과 전통적인 자주의식의 상실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의종 연간(1146-1170)에 일어난 무인정변과 집권은 전통적인 문벌중심 문치편중의 귀족정권을 붕괴시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독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문화의 암흑기가 초래되었고, 중기 문신귀족 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사적 대토지 횡탈에 따른 농장은 한층 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각지의 농민 노예의 잇따른 반란과 고종 18년 (1231)이래 몽고의 야만적인 침략과 지배가 30년 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몸소 겪은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의식은 곧 역사전통에 대한 민족적 의식으로 심화되었고, 이것은 보다 지방적이고 보다 민중 속에서 성장해온 신진 사인층이나 신흥의 선승들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인식을 보이게 되었다. 즉 보다 넓은 국가적인 차원의 민족의식, 자기의 역사전 통에 대한 긍정의 새로운 인식의 전승 속에서, 그리고 뿌리칠 수 없는 이민족의 압제라는 현실의 제약 하에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나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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