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빈법 시행에 관한 심각한 반대, 요구호대상자의 증가, 구빈세의 과중한 부담 등으로 인해 1832년에 구빈법행정과 실무운영에 관한 왕실조사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경제학자인 시니어(Senior) 교수였고, 서기관은 벤담(Bentham) 제자인 젊은 변호사인 차드윅(chadwick)이 되었다. 왕실조사위원회는 2년에 걸쳐 영국의 모든 지방에서의 구빈법행정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관한 보고서를 1834년에 내 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였다. 그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구민구호는 어린이와 노동 가능한 성인이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부분적 구호"의 도입으로 이들을 자립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소위 "영구빈민" 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빈세가 농장주, 지주, 상인과 공장주의 보조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스핀햄랜드 제도(Speenhamland System)에서 실시했던 부분적 구호를 폐지할 것.
둘째, 노동이 가능하면서 구호를 신청하는 모든 사람은 노역소에 수용할 것.
셋째, 거택구호는 병자, 노인, 허약자 어린아이가 있는 과부에게만 실시하도록 할 것.
넷째, 여러 교구의 구호행정을 구빈법연맹(Poor law union)이 조정하도록 할 것.
다섯째, 구호 수혜자의 생활조건이 그 지역사회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생활조건보다는 좋지 않은 정도로 되게 할 것.102)
여섯째, 국왕이 지정하는 중앙통제위원회를 설립할 것.
이들 제안은 1834년 8월 14일에 신구빈법 (New Poor Law)으로 제정되었고, 이후 영국에서 1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구빈법연맹은 가까이 인접해 있는 교구끼리 형성되었는데 이들 구빈법 연맹의 행정은 각 교구 대표로 구성된 빈민보호위원회가 맡아서 했으며, 공동노역소와 구번원을 관리하였다. 일관성 있는 구빈정책을 펴나가기 위해 영구왕실구빈범위원회는 3명의 위원을 지명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왕실 위원회의 최초의 서기관이었던 차드윅이었다. 보조위원은 구빈법연맹을 방문하고, 빈민보호위원회의 각 모임에 참석하며 여러 노역소와 구빈원을 시찰과 검사하는 일을 했다.
여기서 "최소적격원칙"을 적용했다. 구호수혜자의 생활조건을 그 지역사회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보다 좋지 않은 생활조건에 두게 해야 할 정도로 빈민구호가 그 양에 있어 적었다. 이 원칙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빈민보호 위원회는 구호신청자로 하여금 공공의 지원을 요청하기 보다는 어떤 일이든지 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