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산업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계의 발달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농업혁명을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가내수공업 종사자와 농촌근로자들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값싼 노동력의 대상이 되었다. 산업자본가의 노동력 부족 문제는 가내수공업자와 농민들의 몰락에 의해 해소가 되었지만, 정부는 자본가들이 임금을 낮게 책정함에 따라 임금을 보충해주기 위한 재정적 부담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도시와 농촌의 빈민이 늘어남에 따라 구빈행정을 위해 세수도 급격히 증가되었다. 결국 영국의 정부는 스핀햄랜드제도에 의해 발생된 근로의욕 감퇴의 문제, 고용주들의 도덕적 해이 문제, 구빈재정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832년 구빈법을 검토하기 위한 "왕립구빈법관리조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맬서스의 추종자인 나소(Sr. Nassau William)를 위원장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구빈행정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왕립구빈법관리조사위원회는 2년간의 연구작업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제안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첫째, 스핀햄랜드제도에서 제공하던 생계보조금을 폐지한다.
둘째, 일할 능력이 있는 빈민층은 원외구호를 받을 수 없다.
셋째, 일할 능력이 없는 빈민층에 대해서는 원외구호를 유지한다.
넷째, 여러 게의 인접 교구를 합쳐서 구빈법조합(Poor Law Union)을 만든다. 구빈법조합은 유급 감독이사회board of guardians의 이사들에 의해 운영되며, 공동노역장과 구빈원을 관장한다.
다섯째, 구호의 수준은 그 지역의 최저임금보다 낮도록 정한다(열등처우의 원칙 : the principle of less eligibility).
여섯째, 구빈행정을 통제하는 중앙기구를 설치한다. 중앙기구는 구빈조합을 방문하여 구빈행정을 감시한다.
결국 신구빈법은 노역장심사법을 부활시킴과 더불어 유명한 열등처우의 원칙을 만들어내었다. 열등처우의 법칙은 현재까지 모든 공적부조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즉 공적부조의 수준이 너무 높을 경우 사회전반의 근로의욕을 감퇴시키고, 고용주의 부도덕한 착취를 야기한다는 스핀햄랜드제도에서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구빈법은 당시의 지배계층에 유행하였던 맬서스나 스미스 식의 자유방임사상과 벤범의 공리사상의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벤덤(Jeremy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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