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조금 떨어진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창암으로 아버지는 양반이 아니었다. 즉, 창암도 양반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응선을 찾아가 그는 동학에까지 입문하게 된다. 동학은 그 당시 개혁을 원하는 학문으로, 김구의 어릴 적 한이 맺혀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름을 김창수로 개명하였으며, 팔봉접주라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를 하고, 그의 의지를 불태우기까지 이른다. 그는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불기소 처분을 하는등 여러 애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민회회의에도 참가하여 새 시대에 대한 갈망을 꿈꾸기도 하였다.
1911년, 헌병에게 체포되어서 죽음까지 생각하였으나, 죽음은 패배라는 생각으로 일을 열심히 하여서 어떻게든 기회를 열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1919년에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까지 오르게 되었으며, 공산주의를 권유하는 이동휘 국무총리의 이야기를 무시한다. 그는 상해교민단에서 의경대 설치하고, 고문에 추대된다. 그는 임시정부내에서 국무위원 - 내무장에 이르는 단계를 거치고, 1928년에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창시, 한인애국단은 이봉창의 일왕저격,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 투하등 많은 애국활동을 펼치게 된다. 또한 1935년 이동녕․이시영․조완구․엄항섭․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한다. 그의 임시정부에 대한 각별함이 나타난다.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중앙집행위원장이 까지 이르렀으며, 1941년에는 백범일지하편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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