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정권의 탄생과 변모에서의 김종필의 역할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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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권의 탄생과 변모에서의 김종필의 역할 검토
군사 정권의 탄생과 변모에서의 김종필의 역할 검토

1. 중앙 정보부의 탄생

군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인식보다 군 내 파벌 투쟁의 더욱 큰 원인이 된 것은 정치 권력을 궁극적으로 누가 장악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쿠데타를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한 김종필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간의 권력 투쟁으로 나타났다. 직접 통치 기간 중 김종필이 일단 승리한 것으로 보였으나, 권력 투쟁은 제 3공화국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김종필 권력의 토대는 군의 헌병대 조직을 이용해 그가 만든 중앙 정보부에 있었다. 이 기구를 이용하여 그는 군 내외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감시하고 숙청할 수 있었다. 이 기구는 창설 이후 1963년 5월까지 13개의 “반혁명 사건”을 발각하였다.

2. 김종필과 이후락의 권력 투쟁

본격적인 권력투쟁은 김종필이 민정 이양의 제도적 수단으로 추진한 공화당 조직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공화당은 민주 집중제 방식의 고도로 중앙 집권적인 구조로 추진되었다.
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내분에서는 기본적으로 김종필을 지지하였으나, 당시 김종필의 지위 또한 타격을 입어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실제로 박정희의 타협안에 의해 공화당 조직은 원안보다는 상당히 덜 중앙 집중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외유에서 돌아온 김종필파의 파벌이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출범하였으나 박정희에 대한 의존이 처음부터 심화 되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후 보인 정당 정치의 훼손과 개인 권력의 집중은 직접 통치 시절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중요한 모든 국가적 정책들이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일 회담을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이 비밀리에 추진했으며, 1971년의 남북 대화 역시 당시 중앙 정보 부장이던 이후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국무 총리이던 김종필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이는 중정과 내각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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