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20일, 영국 하원의원 랜돌프 처칠과 미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기 명예혁명의 주역인 존 처칠, 즉 초대 ‘말보로 공작’의 8대손이다. 그러나 허울좋은 이름일 뿐, 아버지의 낭비벽이 심해 어렵게 자랐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처칠은 명문사립 해로우 스쿨에 들어간다.
역사와 작문은 뛰어났으나 수학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시험에서 겨우 붙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합격자 102명 가운데 92등이었다. 장교가 된 후에는 인도, 이집트, 수단 등의 식민지를 옮겨 다닌 끝에 1899년 정계로 나가기 위해 군을 떠난다. 이 때 책도 많이 읽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역사, 철학, 정치서적을 수백 권 섭렵해 지식을 쌓고 시야를 넓혔다.
2. 윈스턴 처칠과 정치 입문의 실패사
처칠은 스물다섯 살 때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곧 누구보다 많이 낙선한다. 보수당원이면서도 사회복지와 무역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의 자유당에 가까웠다. 노동자계급에 동정적이었다. 서민대책에 열심이었으며 값싼 식료품 공급을 위해 농산물 관세를 낮추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과의 갈등이 커진 끝에 1904년 자유당으로 옮긴다. 자유당 내각에서 상무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1911년 해군장관이 된 처칠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1924년 자유당이 외교정책과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당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보수당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완고한 제국주의자’인 탓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