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시게루와 국가 재생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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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시게루와 국가 재생의 리더십
요시다 시게루와 국가 재생의 리더십

1. 요시다 시게루의 성장

요시다 시게루는 무사집안 출신으로 다께우찌 다가시의 열네 자녀 중 5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의 친구인 요시다가에 양자로 간다. 나중에 경부철도회사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다께우찌는 후일 그가 외교관이 되자 공직자로서 부정의 유혹을 자르라는 뜻으로 가보인 칼을 선물한다. 그러나 관리 요시다는 잘 나가는 그룹에 끼지 못한다. 처음 간 곳이 만주 봉천의 영사관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30여 년의 외교관 생활 중 해외근무의 절반가량을 중국 각지에서 보낸다.

요시다는 양부모의 큰 재산을 물려 받는다. 메이지유신의 주역 오쿠보 토시미츠의 손녀, 정계 실력자의 딸과 결혼하여 후광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늘에 묻혀 지낸 것은 개성이 강해 윗사람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다가 처음 영사가 되어 만주로 떠날 때 부친은 아는 사이인 아들의 상사 앞으로 편지를 써준다. 그러나 요시다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전한다. 까닭을 묻는 상사에게 그는 “아버지 덕을 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동에 영사로 있던 1915년에는 쫓겨날 뻔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내밀며 윽박지르자, “터무니없는 짓으로 반일감정만 불러 외교를 망친다”며 다른 공관들까지 부추겨 반대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2. 요시다 시게루와 2차 세계대전

1936년 요시다는 총리가 된 친구 히로다 코우키의 권유로 주영대사를 맡는다. 요시다는 영국에 있으면서 정부에 맞서고 비판한다. 1936년 9월 나치독일과 방공협정을 맺기로 한 군부는 모양새를 갖추려고 중요한 나라에 나가 있는 대사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거의 모두 찬성하는데 요시다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군부는 국제공산주의와 함께 싸우자는 것일 뿐 정치나 군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어르나 요시다는 그 결말이 뻔하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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