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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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황진이
영원한 풍류(風流)의 연인-
황 진 이

1. 황진이는 누구인가
黃眞伊. 조선 중동때의 명기로 본명은 眞. 일명 진랑이라 하였으며, 기명은 명월이다. 개성출신으로 어머니 진현금과 황진사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라고 추정된다. 생몰연대에 대한 추정은 설이 분분하나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이덕형의 [송도기이]의 두 문헌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아 “연산군 말기(1502년경)에 태어나 가정초(중종 17~18년)에 유명해졌으며 40세쯤인 중종 35년경(1540년경)에 요절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황진이는 절세의 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무와 시문, 음율등에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불세출의 여인이었다. 15세경 옆집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게되자 죄책감에 기생의 길로 들어선 후 황진이는 당대 최고의 명기로 불리며 숱한 명사들과의 연애담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생불이라 자처하며 10년 동안 면벽수도를 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것과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뒤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황진이는 송도삼절이라는 말을 만들어 개성에는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가 있다고 스스로 자처할 정도로 자존심이 세고 긍지 있는 여인이었다.
그는 출생했을 때 방안에 향기가 감돌아 그야말로 선녀였다는 신비화 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당대와 후대에 걸쳐 널리 사랑 받은 인물이었다. 마흔 전후의 젊은 나이로 병사할 때 남다른 유언을 남겼는데 그것은 “나는 천하남자를 위해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으면 시체를 동문밖에 버려서 온갖 짐승들이 먹게 하여 천하의 여자들이 진이로써 경계를 하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황진이의 죽음으로 송도 고을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슬픔에 잠겼고 이름 모를 풍류객이 그 시체를 거두어 장단의 남정현 고개에 묻어주었고 선조 때의 풍류남아 백호 임제가 평안도사로 부임해가다 그를 추모하며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내어 파직 당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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