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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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교
조선시대 외교

명과의 관계〕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事大)로써 친선을 유지하였다. 여기서 명나라에 사대한다 함은 조선의 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며, 중요한 국정을 보고해 그 의견을 듣는 따위의 일을 말한다.
고려 말에 있었던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은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대부층의 이익이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신흥사대부층의 지지를 받은 이성계가 당시 권문세족과의 투쟁 과정에서 내세웠던 친명정책은 조선 건국 후에도 필요하였다.
명나라는 조공(朝貢)이라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명목상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을 얻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정치상 기본적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에 따르는 관무역으로 이득을 얻고, 선진 문화를 수입했으며, 정권의 국제적 승인이라는 효과를 거두었다.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으나 종계변무(宗系辨誣) 등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이는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조선 태조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으로 약 200년을 끈 다음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여진과의 관계〕 여진과는 교린(交隣)이라는 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여진 추장에게 명예 관직을 주어 형식상 종속 관계를 맺고, 진상과 회사(回賜)라는 관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은 그들의 복종에 만족하고, 여진은 문물 수입으로 만족하는 관계였다.
조선 초기 여진의 갈래는 흑룡강 유역의 야인(野人),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海西女眞) 등이 있었다.
명나라는 영락제(永樂帝:成祖)때 만주 경략을 본격화해 약 180위(衛)를 두어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의 북쪽 경계 밖에는 명나라 지배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 많았다. 조선은 이들을 야인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정복하고 한편으로는 회유하는 정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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