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가의 꿈과 좌절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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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가의 꿈과 좌절 조광조
[야심가의 꿈과 좌절 趙光祖]

급진 개혁을 추진한다는 든든한 후원자였던 중종에게 버림받은 정암 조광조.

비범한 카리스마를 무기로 등장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도덕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 건설을 부르짖었던 인물 趙光祖. 16세기 초반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했다 5년 만에 좌절된 정치 행적은 보수와 현실정치의 벽이 당시에도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개혁정치 추진과 그 실패가 가져다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1519년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국왕 중종이 내린 사약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결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는 마지막 시를 읊었다.

거칠 것 없는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한 사림파 엘리트 조광조. 38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 성향이 짙었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개혁정책은 기묘사화의 참극을 불러왔고, 개혁파 정치세력들은 허망하게 정치권에서 숙청되었다.

조광조는 서울 출생으로 전형적인 조선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국공신 조온(趙溫1347~1417)의 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사림파와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 평안도 희천에 귀양가 있던 김굉필(金宏弼·1454∼1504)에게 수학(受學)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고려말 정몽주와 길재를 거쳐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 사림파의 핵심인물로 1498년의 무오사화로 유배당해 있었다.

영남과 서울을 기반으로 하여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았던 만남, 그러나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사건은 이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만남은 개국공신의 후예 조광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운명적인 것이었다. 영남 사림파의 학맥이 기호 사림파에 접목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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