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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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 목차

1. 서론
2. 본론(정암의 일대기)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현대를 흔히 욕망과 인식의 혼돈시대라고 한다. 끊임없는 소비와 향락에의 욕망이 현대문화를 상징하고, 지적 상대주의는 삶의 가치를 제시해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배금주의와 쾌락추구의 경향에로 나아가고 성과 폭력을 위주한 저질문화가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 들고 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시대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선비정신의 구현자이었다. 그의 도학정치가 현실적으로 좌절되었지만 그의 선비적 자세는 후학들의 좌표였다.
철학의 임무가 인식과 욕망의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라면, 적어도 정암이 목숨을 걸고 구현하려한 그가치의 근거를 밝히는 일은 의미심장할 것이다.

2. 본론
정암(靜菴) 조광조는 1482년 사헌부 감찰 조원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조온은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서 ‘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좌찬성의 자리까지 오랐던 명신이었다.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부지런했으며 검소하였으며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평안도 지방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사하여 김굉필이라는 대학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조광조에게 김굉필은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광조는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열중하였고, 그가 스무살이 될 무렵에는 이미 그 명성이 서울까지 떨칠 정도였다. 이렇듯 김굉필 문하에서 단연 군계일학으로 두각을 나타낸 조광조는 벼슬길에 오르기도 전에 사림파의 영수로 부상하였고, 스물세살 때에는 유배를 당해야 했다. 바로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의 와중이었다. 즉,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신진사류들인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이 찬성했다고하여 이들을 모조리 처형시키고 나머지 신진사류들은 삭탈관직 또는 유배를 보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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