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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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업적
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 문인으로 자(字)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 탁옹(卓翁), 태수(苔수) 다산(茶山) 등 많다. 어릴적의 소자(小字)는 귀농(歸農), 당호는 여유(與猶)였다. 경기도 광주, 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召川) 마재(馬峴)에서 출생하였다.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낸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인데 명상(名相)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정약용은 4남 2녀 중에서 4남이다. 부인은 풍천 홍씨(豊川 洪氏)인데, 슬하에서 6남 3녀를 두었다. 그중 4남 2녀는 일찍 죽었고, 학연(學淵), 학유(學遊)와 사위 尹昌謨(윤창모)가 있을 뿐이었다.
나이 16세에 당대의 명인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등과 성호(星湖) 이익(李 瀷)의 학문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이 벽(李 檗)을 만나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그는 유학경전에도 통달하여 연구업적은 지대하다. 내강중용강의(內降中庸講義), “내강모시강의(內降毛詩講義)”,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다.
1791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 신자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의 옥사(獄事)가 있은 이후 천주교로 인한 세상사가 뒤숭숭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周文謨 神父)의 변복 잠입 사건이 발각 나자 평소 정약용을 지극히 총애하던 임금 정조(正祖)는 일시적으로 그를 피신하게 하려고, 그의 관직을 병조참의에서 일개 금정찰방으로 강등하여 밖으로 내쳤다. 이 시기는 불과 반년도 채 되지 못하였다.그래도 천주교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냈는데(1797~1799) 2년여 동안 타처(他處)에서 봉직을 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이렇게 있는 동안 그는 마과회통(麻科會通), 사기찬주(史記纂註)와 같은 저술을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달래었다. 그가 다시 내직(內職)으로 돌아온 지 미처 1년도 되지 못하여 정조가 승하(昇遐)하였는데 1800년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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