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1919년 2월 14일 이승훈(본명 이인환, 호는 남강) 장로는 평양 기흘병원에 목사들을 모으고 3·1 운동 거사에 대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 때에 몇몇 목사들은 이 장로의 설명을 듣자마자 자기들은 종교인이므로 그러한 정치운동은 할 수 없으니 빠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강은 책상을 치며 나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천당엘 갈 수 있소! 이 백성이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목사들만 이 천당에서 편히 앉아 내려다 보겠소라고 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장로교의 길선주, 감리교의 신홍식이었다. 오화영이 오산학교 교장이며, 3·1 운동 주도자인 남강을 만난 것은 이로부터 일주일 후인 2월 20일 경성부 수창동(현 창신동) 229번지 당시 중앙청년회 간사 박희도의 사랑방이었다. 박희도와 오화영 목사를 비롯하여 이곳에 모였던 정춘수 목사, 오기선, 신흥식 목사는 의기투합하여 다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구체적 방안으로 경향에 기독교인 동지를 구하여 이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