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개화라는 말이 쓰인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라 하는데, 이는 187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문명개화’라는 말이 1876년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화사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일찍이 문호개방을 주장한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등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학파(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는 두 차례 청에 가서 서양문물의 우월성과 개항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오경석은 실학자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서 수차례 청을 다녀온 역관이었고, 유홍기는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에게 수학하였으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고 신무기를 만든 신헌(申櫶), 역시 김정희의 문하로 두 차례 청을 다녀온 바 있던 강위(姜瑋)등도 초기 개화사상가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이 개화사상을 갖게 된 데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이라 함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들은 대개 박지원․정약용․김정희 등 실학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청의 문물이라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차원에서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박지원의 사상이 그 손자인 박규수의 개국통상론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오경석․유홍기를 비롯한 다른 개화사상가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인적 연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외적 요인은 청을 통하여 접한 새로운 지식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청을 다녀온 경험이 있거나 『해국도지』․『영환지략(瀛環志略)』등 청의 개화관련 서적을 읽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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