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梁起鐸) 선생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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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雩岡 양기탁(梁起鐸) 선생
1871. 4. 2~1938. 4. 19

․1904.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新民會) 조직(징역 10년)
․1934.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취임
․1937. 한국광복진선 결성(중국 남경)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70평생을 오직 구국운동(救國運動)과 민족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위해 일신(一身)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던 선생의 숭고(崇高)한 업적(業績)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애국정신(愛國精神)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유림(儒林) 명망가의 문하인으로 심오한 학문에 심취하다

1871년 4월 2일 평남 평양 소천(小川)에서 부친 시영(時英)과 모친 인동 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의종(宜鐘),자(字)는 자명(子明), 아호는 우강(雩岡), 기탁(起鐸)이다.
선생은 어릴적에 양친의 지혜로운 가정교육을 받아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총명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15세가 되던 해에 문장이 뛰어나 큰 포부를 가지고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우연히 평북 위원(渭原)에 사는 유림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그의 심오한 학문과 높은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여 일찍이 서양문물에 접함으로써 개화파 청년이 되었다.

미국, 일본 등을 방문하여 서구문명에 대한 견문(見聞)을 넓히다

1895년 12월부터 1897년 3월까지 미국인 게일(Gale, J. S, 奇一) 박사가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하여 부총무장(副總務長)급으로 적극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었다.
출옥후 일본 장기(長岐)를 거쳐 미국에 건너가서 3년동안 있으면서 견문을 넓힌 후 33세가 되던 해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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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자료, 정부자료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