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朴尙鎭) 선생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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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固軒 박상진(朴尙鎭) 선생
1884. 12. 7~1921. 8. 13

․1912.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거점 마련
․1915. 조선국권회복단 참여, 대한광복회 총사령
․1917. 친일 부호배 처단 및 군자금 모집 활동 등 의열투쟁 전개
․1921.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오인(吾人)은 대한독립광복(大韓獨立光復)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子子) 손손(孫孫)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 1915년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결의문 -

선생은 1884년 12월 7일 경남 울산(蔚山) 송정동(松亭洞)에서 시규(時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承旨)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出系)하여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이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식민지 관리 되지 않겠다 판사직 사임

하지만 선생은 봉건지배질서를 고수하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평리원(平理院) 판사 및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서서히 봉건의식을 탈각하여 가던 허위의 영향이기도 하였다. 생활 태도는 유림적 자세를 견지하였지만, 사고 방식은 전향적이었고 근대적 신학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7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1910년 졸업할 때까지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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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